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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태도 병이던가?
  •  관리자
  • 날짜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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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도 들어오지 않는 어느 벽촌의 여름날 소설가 이상(1910~1937)은 온종일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 빈둥거리며 무더위를 견딘다. 1937년 4월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달이 못되어 '조선일보'에 연재된 수필 '권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국어사전에는 권태를 '싫증을 느껴 게을러짐' 또는 '심신이 피곤하고 나른함'이라고 풀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권태란 가령 따분한 강의나 지루한 노동이 끝나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는 사소한 감정일 따름이다. 그러나 권태를 20여 년간 연구한 미국 웨스트플로리다대 심리학자 스티븐 보다노비치는 권태를 쉽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우울증, 불안장애, 약물중독, 상습도박, 알코올 중독에 걸리기 쉽고 분노, 공격적 행동, 대인관계 미숙을 곧잘 드러내며 직장이나 학교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권태는 거의 1세기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 주제였다. 1926년 영국에서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노동에 얽매인 공장 근로자의 심리 상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권태는 일종의 정신적 피로이며, 공장 조립라인의 지루한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1986년 미국 오리건대 심리학자 노먼 선드버그는 '권태 성향 척도(BPS; Boredom Proneness Scale)'를 발표했다. BPS는 28개 질문 항목에 점수를 매겨 개인별로 권태에 빠지기 쉬운 정도를 측정한다.

2005년 보다노비치는 '성격평가저널(Journal of Personality Assessment)'에 발표한 논문에서 BPS 분석결과 권태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고했다. 하나는 외부자극이다. 신기하고 변화무쌍하며 흥분시키는 자극이 주어지지 않을 때 권태를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내부 자극이다. 자기 스스로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권태를 자주 느낀다. 스스로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권태감을 이겨내지 못해 마약 중독에 빠지는 등 평생 동안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게 마련이다.

한편 2007년 캐나다 워털루대 인지신경과학자 대니얼 스마일렉은 '의식과 인지(Consciousness and Cognition)' 온라인 판 6월 15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권태를 느끼는 성향은 나이 들면서 주의력이 저하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했다. 대학생 300여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기억력과 주의력이 떨어질수록 BPS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행복과 성취감을 느끼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경우에도 권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2007년 캐나다 요크대 임상심리학자 존 이스트우드는 '성격과 개인차(Personality and Individual Differences)' 4월호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BPS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한다는 논문을 실었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일터를 옮기거나 사무실 분위기를 바꾸어볼 수도 있고 새로운 일이나 취미에 관심을 가지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명상도 좋은 해결책이다.

물론 권태도 이로운 점이 없지 않다. 하는 일이 싫증나면 시간 낭비라는 판단을 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권태를 느끼는 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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